제주 돌담 앞에서 빈 어머니의 기도, 50대의 나에게 남긴 마음가짐

 

노을 하늘 아래 돌담과 정화수 그릇.
 노을 하늘 아래 돌담과 정화수 그릇

제주에는 돌이 많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담장도 돌이고, 집 기둥도 돌이고, 밭을 나누는 경계도 돌입니다. 저는 제주에 살면서 이 돌들을 그냥 지나친 적이 별로 없습니다. 화산섬인 제주는 태생부터 돌과 함께였고, 그 돌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깊이 얽혀 있다는 걸 살면 살수록 느낍니다.

돌 앞에 물 한 사발, 형식 없는 기도

제주 여인들은 힘들 때마다, 마음이 복장 터질 때마다 돌 앞에 물 한 사발을 떠놓고 빕니다. 절에 가지 않아도, 교회에 가지 않아도, 산 아래든 밭머리든 집 뜰 어귀든 그 자리에 놓인 돌 앞에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 기댈 데 없던 어머니들에게 돌은 가장 가까운 위로자였습니다.

"도와주소. 우리 자식 이번에 시험 잘 보게 해주소."
"우리 남편 바다 나갔다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소."
"어머니 병 좀 낫게 해주소."

이런 기도에는 큰 절차도 형식도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돌 앞에 진심을 놓는 것뿐입니다. 제주에서는 이런 행위를 '빈다'라고 합니다. 절실한 마음을 담아 돌에 빈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나 자신을 비우는 일이었습니다.

화산돌과 함께 단단해진 사람들

돌에 깃든 이 믿음은 제주의 자연환경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제주 돌은 화산 분출로 만들어져 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모양도 거칠고 단단합니다. 제주 사람들은 이 거칠고 강한 돌과 함께 살아오면서 돌처럼 묵묵히 견디고, 돌처럼 단단하게 버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주는 돌 문화가 유독 다양합니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돌하르방, 집을 지키는 성주돌, 밭을 구분 짓는 밭담, 그리고 이름 없이도 누군가의 기도를 묵묵히 받아 준 작은 돌까지. 제주의 돌은 자연물이기 이전에 신앙이었고, 문화였고, 위로였습니다.

미신이라 해도, 그 정성만큼은

학자들은 제주의 돌 문화를 무속과 민간신앙이 섞인 형태로 설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돌에 깃든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주의 여성들은 돌 앞에서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말없이 자신을 지탱해 줄 힘을 빌었습니다. 누군가는 미신이라 하고, 근거 없다고도 말하지만, 그 정성과 진심은 어떤 제도보다 깊고 어떤 형식보다 성실했습니다.

50대의 나에게, 이 이야기가 남긴 것

퇴직을 앞두고 노후를 준비하면서 저는 자주 이 돌들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노후 준비라고 하면 연금 계산기부터 켜고, 재무 설계부터 세우고 싶어 합니다. 물론 숫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주 어머니들이 돌 앞에서 매일 반복했던 그 단순한 행위, 형식은 없어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그 정성이야말로 노후를 버티는 진짜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창한 계획 하나보다, 매일 반복하는 작은 정성이 더 오래갑니다. 운동이든, 저축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한 형식을 갖추려고 미루기보다,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꾸준히 해나가는 것. 그것이 제주의 돌이 오랜 세월 저에게 말없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오늘도 제주의 어딘가에서 누군가 조용히 돌 앞에 앉아 빌고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저는 그 마음이 노후를 준비하는 우리 50대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남에게 보이지 않아도, 나만의 자리에서 매일 정성을 쌓는 것. 그것이 결국 단단한 노후를 만듭니다.

Post a Comment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