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어릴 때 들었던 라디오 방송 한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내년이면 벌써 예순인데, 그때는 학교도 가기 전이었으니까 정말 까마득한 옛날이에요. 줄거리도 등장인물도 다 잊었는데 이상하게 딱 한 장면, 한마디만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 있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오래된 기억이 문득문득 찾아오는 게 신기해요. 오늘은 그 한마디와, 요즘 제가 겪은 일을 함께 풀어볼까 해요.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이야기
제가 어릴 때는 텔레비전이 없고 라디오만 있던 시절이었어요. 저녁이 되면 온 식구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서, 매일 조금씩 소설을 읽어주는 연재 방송을 듣는 게 하루의 낙이었어요. 지지직거리는 소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우곤 했죠. 지금은 그 소설 제목도 줄거리도 거의 기억이 안 나요. 등장인물 이름조차 가물가물한데, 그런데 딱 한 장면만은 이상하게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그래도 나무를 계속 해야 하나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어요. 산에 가서 아무리 나무를 해다 팔아도 살림이 통 나아지지 않는데, 그래도 계속 나무를 해야 하느냐고요. 힘들게 일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으니 답답했겠죠. 아버지는 바로 답을 주지 않고 되물어요. "그럼 너는 지금 다른 무얼 할 수 있니?" 아들은 딱히 할 말이 없었어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없었으니까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해요.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게 나무하는 일이면, 그거라도 계속하라고요. 당장 살림이 안 펴져도,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도 올 거라고요. 어린 마음에 그냥 흘려들었을 법한 대화인데, 이 말이 왜 이렇게 오래 남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돌아보면 제 인생에서 크고 작은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이 한 구절이 저를 버티게 해준 적이 참 많았어요. 직장을 옮길 때도, 뭘 해도 안 풀리는 것 같을 때도,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 돈도 없고 힘도 없을 때도요. 그럴 때마다 별다른 묘수를 찾기보다, 지금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게 최선일 때가 참 많더라고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저 스스로 견뎌내야 하는 몫이었으니까요.
예순을 앞두고 다시 떠오른 이유
요즘 제가 일하는 곳 얘기를 좀 해볼게요. 지금 일하는 매장은 실업급여를 두 번이나 받으면서, 이런저런 곳을 알아보다가 겨우 구한 자리예요. 오십 넘어 새 일자리를 구한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더라고요. 이력서를 넣어도 연락 오는 곳이 없던 날들을 지나, 어렵게 자리를 구했으니 이번엔 오래 다니고 싶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거의 1년이 되도록 매출이 안 나왔어요.
하루 종일 손님이 뜸한 매장에 혼자 앉아 있으면, 속으로 '이러다 매장 빼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어요. 이 나이에 여기서 그만두면 또 어디 가서 새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그냥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매장을 지켰어요. 1인 매장이라 제가 쉬는 날엔 팔아줄 사람이 아예 없는 구조였거든요. 몸이 아파도 함부로 쉴 수가 없었어요. 손님이 뜸한 날은 매장 안에 저 혼자 덩그러니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곤 했어요. 그런 날은 유난히 하루가 길게 느껴졌죠.
1인 매장에서 11개월을 버틴 이야기
그만둘 거면 그만두더라도, 끝은 깔끔하게 남기고 싶었어요. 유종의 미라고 하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 견뎠는데, 신기하게도 11개월째 접어들면서부터 매출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어요. 본사에서도 다들 놀랄 정도였어요.
마지막 직장이라 생각하고 일했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뿐이라고 여겼는데, 정말로 매출이 나오고 매장을 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니까 얼마나 마음이 놓이던지요. 숫자로 매출이 찍히는 걸 보면서, 제가 버틴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서 혼자 코끝이 찡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어릴 때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 아버지의 말이 다시 한번 마음속에서 울리더라고요. 지금 할 수 있는 걸 계속하다 보면, 정말로 좋은 날이 오는구나 하고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나무하는 것뿐이면, 그 나무를 계속하라는 말.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살아보니 진짜 힘이 되는 말이었어요. 50대인 우리도 그렇잖아요. 당장 큰 변화를 만들 수는 없어도, 지금 자리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와요. 거창한 목표나 대단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저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더라고요.
혹시 요즘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이 오래된 라디오 한 구절을 나눠드리고 싶었어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나무를 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