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통역 중 숫자 하나에 회의실이 얼어붙던 그날

그날의 협상 긴장과 타협의 순간
그날의 협상 긴장과 타협의 순간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 회의실 공기가 그대로 떠올라요.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늦은 오후였고, 에어컨 바람이 조금 세게 나와서 팔에 소름이 돋았던 것까지 기억나요. 저는 시계를 보며 속으로 "이 미팅, 언제 끝나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있었던 일이 지금까지도 제 안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통역 현장이 됐어요. 지난 글들에서 통역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말 기억에 남는 그날의 장면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실감 나게 풀어보고 싶어졌어요.

■ 오후 3시, 예정에 없던 협상이 시작됐다

원래는 간단한 인사 미팅이었어요. 30분 정도 예정이었고, 저도 큰 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어요. 커피 한 잔 놓고 서로 명함 주고받는 자리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인사가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한쪽에서 계약 조건에 대한 불만을 꺼내기 시작했고, 저는 준비 안 된 상태로 갑자기 실시간 협상 통역을 하게 됐어요. 손에 들고 있던 메모장에는 빈 페이지밖에 없었고, 저는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문장을 어떻게 옮길지 머릿속으로 조합하고 있었어요.

■ 그때 오간 말들, 지금도 문장이 생생하다

정확한 워딩까지는 아니어도, 그날 오간 말의 흐름은 지금도 눈에 선해요. 상대측 담당자가 "지난번 논의했던 조건과 지금 제시안이 다르다"는 취지로 말을 꺼냈고, 우리 쪽에서는 "그 부분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방어적으로 나왔어요. 저는 그 사이에서 양쪽의 뉘앙스 차이까지 살려서 옮겨야 했어요. 너무 날카롭게 옮기면 감정이 격해질 것 같고, 너무 부드럽게 옮기면 요점이 흐려질 것 같아서, 문장 하나하나를 고르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어요.

■ 숫자 하나에 정적이 흐르던 순간

가장 긴장됐던 순간은 금액 얘기가 나올 때였어요. 상대방이 구체적인 숫자를 말했는데, 그 숫자를 듣는 순간 회의실 공기가 확 달라지는 걸 느꼈어요. 우리 쪽 담당자의 표정이 굳었고, 저는 그 숫자를 그대로 옮기면서도 목소리 톤을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려고 애썼어요. 통역은 내용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의 온도까지 함께 전달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몇 초간 아무도 말이 없었고, 그 정적을 깨는 것도 결국 제 다음 문장이었어요.

■ 말과 말 사이, 제가 느낀 압박감

그 자리에서 저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동시에, 분위기를 더 나쁘게 만들면 안 된다는 부담을 같이 느꼈어요. 문장 하나 잘못 옮기면 협상 전체가 틀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손끝이 살짝 떨렸던 게 기억나요. 목이 마른데도 물 마실 타이밍조차 찾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더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어요. 속도를 늦추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어요. 옆에서 담당자가 저를 힐끗 쳐다보던 그 눈빛도 아직 기억이 나요.

■ 결국 협상은 타결됐고, 저는 녹초가 됐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그 미팅은 결국 양쪽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타결됐어요. 회의실을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어요. 30분짜리 인사 미팅인 줄 알고 갔다가, 두 시간짜리 협상 통역을 하고 나온 거였으니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제야 목이 얼마나 말랐는지 느꼈고, 로비에서 물 한 병을 사서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어요. 집에 돌아가서는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나요. 저녁도 거른 채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어요. 성취감보다 먼저 밀려온 건 온몸의 피로였어요.

■ 그날이 왜 아직도 생생한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그날이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아마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제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처음으로 확인한 날이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준비 없이 던져진 상황에서도 결국 끝까지 해냈다는 그 경험이, 그 뒤로 어떤 어려운 자리에 가더라도 "그때도 해냈으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의 기준점이 되어줬어요. 지금도 가끔 긴장되는 일이 생기면, 그날 회의실의 정적과 제 떨리던 손끝을 떠올려요. 그리고 "그때도 버텼는데 이번이라고 못 버틸까" 하고 스스로를 다독여요.

지금 예상치 못한 일 앞에서 당황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그 순간을 버텨낸 경험 하나하나가 결국 다음 순간을 버티는 힘이 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저 그 자리를 끝까지 견뎌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음을 위한 자산이 되더라고요. 저도 그날 이후로 어떤 자리든 조금은 덜 두려워졌거든요. 오늘도 여러분의 하루를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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